그러나 지금까지 내가 속한 사회에서 교육받은 바에 의하면 결국 마지막에 가서 화는 조금 누그러뜨리는 것이 덕이며 슬퍼도 눈물을 최대한 참는 것이 덕이며 애인이 자신에게 거짓말하고 다른 남자를 만나도 허용해주는 것이 쿨한 것이며 구걸하는 장님은 장님이 아닐 것이라 믿음으로써 연민의 감정을 자제하고 길거리에 버려진 애완동물은 어떻게든 잘 살것이라는 막연한 불확실성에 동정을 희석시키는 것임이 대체적으로 맞는 해석이었다.
하지만 내가 꿈꾸는 세상은 그런 것이 아니다.
단지 아닌게 아니고 아닌 것이 확실하다.
사회적 규약에 의해 친구라고 불리는 사람들 중 몇몇 인간들이 있다. 그들에게 받은 것은 우정이 아닌 배신과 모욕이었다. 지금껏 내가 교육받은, 그리고 성공적으로 그것을 터득한, 감정에 대한 사회적 규약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것을 지금처럼 모르는 척 지나치지 않았을 것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다소간의 공격적인 상호작용이 있었을 것임에 분명하고, 그것은 어쩌면 그 감정을 보다 극단적인 것으로 몰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냥 조금 비겁하게 끓는 마음을 억누르는 것이 좋았을 것이라고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그들 역시 그들이 속한 사회의 영향을 받아 내면의 감정 중 일부만을 나에게 표현했을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따지고 보면 그들이 나를 때리거나 날카로운 도구로 내 신체를 해하지 않은 것은 나와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이 사회의 감정 조절 교육 효과가 발현한 탓인지도 모른다.
동시에 그들이 나와 매우 다르다는 것도 인정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상대적으로 우월한 나의 학습능력을 감안할 때, 그들이 나와 같은 것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잘 학습하지 못해 나에게 불쾌한 감정을 드러낸 것이라고 생각하면 지나간 일은 이제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으로 내려온다.
여기서 나는 스스로의 행동, 판단, 감정 기준에 dissonance를 느낀다. 지금껏 내가 인생의 중요한 결정들을 내렸을 때 중요한 기준이 되었던 것은 일단 해보고 후회하던 말던 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상대방이 본인을 humiliate하고 mocking하고 despise한다거나 반대로 상대방이 본인에게 호감이 있다는 것을 표현할 때 그 표현이 전제하는 사회적 약속들을 일단 받아들이고 나서 그 뒤에 어떻게 할지를 결정하는 것이 이론적인 나의 행동양식이지만, 그것이 감정과 결부될때에는 그렇지 않다. 지금껏 받은 나의 기묘한 교육에 의해 다른 것들과 일관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 원칙을 대체하고자 스스로 만든 행동 양식은 상호주의이다. 하지만 그 상호작용의 양상은 나만의 방식에 의존한다. 어떤 explicit한 자극에도 나는 implicit하게 반응하기로 한다.
만일 나의 반응이 매우 explicit하다면 그것은 그 수준에서의 implicit한 반응이라 간주하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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